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제프 2세 (문단 편집) === 가족과의 관계 === 첫번째 아내는 파르마 공작 [[필리포 1세(파르마)|필리포 1세]]의 딸 [[파르마의 이사벨라]][* [[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]]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한 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[[파르마 공국]]이 [[보르본 왕조|스페인계 부르봉 왕조]]로 넘어갔고 이사벨라의 아버지 펠리페 왕자가 파르마 공작이 되면서 그녀 역시 파르마 공녀가 되었다.]로 정략결혼으로 맺어졌다. 그러나 요제프는 뛰어난 미모에 재주도 많은 재원인 이사벨라를 무척이나 사랑하였고 부부사이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. 하지만 이사벨라가 21세에 두 번째 출산 직후 천연두에 걸려 요절한 뒤, 죽은 아내를 마냥 그리워하던 요제프는 잔혹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. 사실 이사벨라는 요제프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남편의 여동생, 즉 시누이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장 사랑받은 딸인 [[마리아 크리스티나(오스트리아)|마리아 크리스티나]]를 열렬히 사모하는 [[레즈비언]]이었다는 것. 이것을 알게 된 계기도 재혼을 한사코 거부하던 요제프를 보다 못한 크리스티나가 본인에게 쓴 이사벨라의 연애편지를 보여주고 나서였다. 안 그래도 성격이 까칠했던 요제프는 인생에서 가장 사랑한 첫 배우자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이후로 더욱 냉소적이고 인간불신적인 성격으로 변했다. 이후 바이에른 선제후 [[카를 7세]]의 딸 마리아 요제파와 재혼했으나, 부부 사이는 매우 소원했고 요제파 역시 천연두에 걸려 요절한다. 그리고 이사벨라가 남긴 유일한 자녀로서 매우 귀애했던 딸 마리아 테레지아(쁘띠 테레즈)마저 늑막염에 걸려 8세라는 어린 나이에 죽는 [[참척]]의 고통을 겪는다. 이런 일을 연속적으로 겪으며 요제프는 결국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고, 그의 사후 제위는 남동생으로 토스카나 대공이던 [[레오폴트 2세]]가 이어간다. 차갑고 냉정하며 거의 인간 불신에 가까운 성격이었다지만 가족들과는 대체로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.[* 제위를 물려받을 장남이자 황태자이긴 했으나 어머니 [[마리아 테레지아]]에게 귀애받는 자녀는 아니었기 때문에, 어머니에게 총애받던 카를과 크리스티나와는 사이가 나빴던 반면 똑같이 차별당하며 동병상련의 처지였던 나머지 동생들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.] 특히 14살이나 어려 거의 조카뻘인 막내 여동생 [[마리 앙투아네트]]를 딸처럼 여겨 사이가 좋았다. 동생 바보였던지라 마리 앙투아네트의 남편 [[프랑스 국왕]] [[루이 16세]]가 [[불임]]이라는 소문이 돌 때 여동생을 위해 팔켄슈타인 백작이라는 가명[* 다만 무지렁이 백성이 아니고서야 팔켄슈타인 백작이 요제프 2세임을 모를 수는 없었다. 팔켄슈타인 백작위 자체가 부친 프란츠 1세의 작위 중 하나로 그의 사후 자식인 자신이 물려받은 것이었기 때문. 그렇기에 대부분의 프랑스 백성은 그가 요제프 2세임을 알았고 그의 방문은 프랑스 전 신민의 관심을 모았다. 요제프 2세는 또 신민의 관심을 받는 법을 잘 알던 지라 프랑스 체재 중 베르사유 궁에 국빈으로 머물지 않고 '''[[파리(프랑스)|파리]]'''에 숙소를 마련했고,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사람을 만나 큰 이슈가 되었다. 참고로 이 팔켄슈타인 백작위는 [[러시아 제국]]에 갔을 때도 써먹었다. 이쯤 되면 외교용으로 신분을 명목상으로나마 가리기 위한 작위로 쓴 것으로 추정된다.]을 자칭해 직접 프랑스로 진상을 확인하러 갔다. 루이 16세를 만나 대화하고서는 "'''프랑스 국왕은 처음에 딱 봤을 때는 바보 같았는데 차분하게 길게 이야기를 나눠 보니 이 사람이 생각보다 지성인임을 알겠더라'''"라는 평가[* [[루이 16세]] 항목 참조.]를 남겼다고. 진상은 그의 성기능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성관계를 극구 기피하는 성향이었던 것이고, 요제프 2세의 설득에 따라 그와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사이에 자식들이 생기게 되었다. 이때 [[부르봉 왕조]]와 여동생 [[마리 앙투아네트]]에 대해 무척 걱정하며 수십 조항에 달하는 권고문을 남겼다.[* 이 중 한 구절에서 '''[[혁명]]'''이 언급된다. 프랑스의 불안한 정세를 경고하며 왕과 왕비가 잘 처신하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걱정했다. 결국 요제프의 예상은 [[프랑스 혁명|최악의 형태]]로 실현되고 만다.] 요제프 2세와 대화를 나누었던 프랑스 지식인들은 그가 계몽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